♝ 추억*여름날의 파랑새 ♝

즈! 1년 전 시점 / 여름
세나 이즈미 2학년, 세이야 엔오 1학년



𝑺𝒖𝒎𝒎𝒆𝒓 𝑩𝒍𝒖𝒆𝒃𝒊𝒓𝒅



여름은 이상한 계절이다. 순간의 푸르름과 싱그러움이 주는 감동은 봄비에 눈 녹듯 사라지고, 우리가 여름이라고 부르는 계절의 실상은 무더위와 장마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억 속 여름의 모습은 덥고, 땀나고, 불쾌하고, 심지어 끈적이는 계절이 아닌 푸르고 아름다운, 창 너머에서 시원한 바람이 한순간 몰이쳐 들어오는 모습이다. 

혹자는 이것은 ‘여름의 마법’이라 불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을 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이건 필시 여름이 우리 모두에게 거는 마법이 아니겠냐- 며 말이다. 

여름의 마법에 걸린 사람들 중 몇몇은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이미 맞이하였거나, 맞이하고 있는 중 이거나, 곧 맞이할 것이라는 것. 

그 해 여름, 사립 유메노사키 학원에도 이 ‘여름의 마법’에 걸린 두 남녀가 있었다. 



“··· 선배 지금 저랑 장난하세요? ”

조금 화가 난 듯 한 목소리. 은빛 머리를 단정히 묶은 아이는 작성 중이던 서류를 꽉 쥐었다. 손아귀의 힘에 종이는 한껏 구겨져 버렸기에 아이는 분명 이 서류를 다시 써야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세이야 있지, 우리가 일부러 그런 거는 아니고··· ”

“···ㄱ, 그래 엔오 쨩! 우리가 어떻게든 해보려 했는데 정말 어쩔 수 없이··· ”

남은 기한은 일주일 하고도 삼일. 세이야 엔오는 고개를 살짝 들어 차게 식은 눈으로 선배들을 바라봤다. 아, 저번 일도 내가 했는데. 덕분에 지금 이 기획서도 내가 쓰고 있는데. 당장 앞으로 써야 하는 기획서만 해도 몇 개인데. 

다른 애들은 자기네 부서 선배들이랑 회식도 하고 일도 잘 배운다는데… 이 선배들은 기한 일주일 조금 넘게 남은 일이나 들고 오고…

아, 기획부 괜히 왔나.

엔오는 고개를 살짝 들어 선배들-기획부-를 바라봤다. 다른 학생들의 플라스틱 명찰과는 다르게 학생회임을 나타내는 반짝이는 은빛 명찰이 눈에 띄었다. 각각의 명찰에는 이자나와 쇼오, 아사히나 아이노라는 이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3학년 기획부 부장 이자나와 쇼오, 2학년 기획부 차장 아사히나 아이노. 엔오의 학생회 부서 선배인 이 둘은, 불행하게도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학생회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엔오가 이 둘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이 실력으로 이번 학생회에 이름을 올린거지?‘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기획부의 주된 업무-요청받은 행사 또는 활동의 세부사항 기획하기-는 엔오의 몫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부원 둘은 진작에 탈주했고, 셋이서 해도 힘든 일을 혼자서 하니, 엔오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일도 한두 개여야지, 열 개가 넘게 머리를 쥐어짜 내니 이제는 소재를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지우고, 다시 작성하고, 결재받기를 수십 번. 이쯤 되니 엔오도 나름 안목이라는 것이 생겨서 받아오는 일을 하나하나 등급 매기듯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쯤 되니 알 수 있었다. 이자나와 쇼오와 아사히나 아이노는, 일감 하나는 끝내주게 괜찮은 걸로 골라온다는 걸. 그리고 이거 때문에 기획하는 능력은 제로에 수렴하는데도 학생회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걸. 

···내가 불쌍한 건지, 이 선배들이 불쌍한 건지, 우리가 다 불쌍한 건지 모르겠네. 

엔오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 선배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 생각 정리를 마친 엔오가 입을 열었다.

“알겠으니까··· 기한만 늘려주세요. 이 시간 안에는 못 끝내요. 적어도 2주 반은 주셔야 한다고 말해주세요.”

“어? 진짜? 정말 고마워 엔오 쨩···! 기한은 우리가 어떻게든 늘려 올게! 그렇죠 부장?”

“ㅇ, 어? 어! 나랑 아사히나가 어떻게든 해볼게!”

허둥지둥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선배에 엔오는 착잡한 듯 웃었다. 오늘 점심··· 라멘 나온다고 했는데 못 먹겠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엔오는 매점에 들러 빵과 음료 하나를 샀다. 그래 제군들. 오늘 내 밥은 너희들이다.  

한 손에는 아까까지 작성 중이던 기획서 종이와 펜을, 다른 한 손에는 방금 산 제 점심을 들고 엔오는 자신이 이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향했다. 

다른 학과 건물과 아이돌과 건물 사이에 있는 공터. 보통의 학생들은 있는지조차 몰라 잘 가지 않는 곳이었지만 엔오는 그 장소를 좋아했다. 사람이 거의 없어 조용하고, 옆 정원과 붙어 있어 의외로 조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항상 앉던 자리에 앉으러 건물 코너를 도는데, 그곳에 익숙하지 않은 형체가 보였다. 

한 남자아이가 눈을 감고 이어폰을 꽂은 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넥타이 색을 보아하니 2학년인 듯 보였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함께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엔오는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피부는 반짝거렸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상당한 미형임을 알 수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몸이 탄탄하게 균형 잡혀있는 듯 보였다. 

이 사람은 누구지- 라는 처음의 의문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름은 뭘까? 하는 호기심에 그 사람 앞으로 몸을 숙인 순간,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떠 엔오를 마주했다. 

깊고 푸른 눈. 바다가 생각나는 너무도 예쁘고 진한 푸른색이었다. 엔오는 사람의 눈이 저렇게 예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뺏긴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서 눈을 쉬이 뗄 수 없었다. 

엔오도, 그 사람도 서로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순정만화의 한 장면이라고 할 법 한 모습이었다. 초여름이라는 계절 아래,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듯 보였기에.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그 사람이었다. 

“ ··· 언제까지 볼 거야?”

“아, ···. 죄송해요. 여기에 저 말고 누가 있는 건 처음 봐서···”

엔오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하마타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이 사람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분명 엉덩방아를 찧었을 것이다. 

“조심.” 

“감사합니다···.”

진짜 최악이다, 세이야 엔오. 초면인 사람한테 실례나 저지르고···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그 사람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찰나,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는 나를 보고도 반응이···?”

“··· 네?”

뭐죠? 제가 놀라야 하나요? 엔오는 황당함 반, 궁금증이 반 섞인 표정을 지었다. 뭔데··· 누군데······.

그런 엔오의 표정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세나 이즈미. 이 이름 들어본 적 없어?”

엔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게 누군데······.

“정말 들어본 적 없어? 나 누군지 몰라?”

엔오의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명의 얼굴과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세나 이즈미, 세나 이즈미, 세나 이즈미··· 그게 누군데!

“네 모르겠는데요··· 누구신데요?”

“··· 그럼 『Knights』는?”

“나이츠···?”

나이츠… 나이츠…. 아 저번에 반 친구들이 무슨 영상 보면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잘은 몰라요.”

엔오의 말에 그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놀란 것 같기도, 조금은 속상한 것 같기도 했다. 

“··· 그럼 이름이 혹시···”

“··· 맞아. 세나 이즈미.”

“아··· 몰라봬서 죄송해요. 연예인에 관심을 안 가져서···.”

“하아··· 괜찮아. 네 잘못도 아니고.”

“그래도··· 유명하신 분 같은데.”

“···. 넌 1학년?”

“아, 네···! 일반과 1학년 세이야 엔오··· 입니다.”

“명찰은··· 보니까 그쪽 학생회 같고. 여기서 뭐 하려고?”

“그냥 기획서 쓰려고요. 제가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여기.”

그··· 세나 선배? 는 뭐 하고 계셨어요? 이쪽으로는 사람들 잘 안 오던데. 

엔오의 말에 이즈미는 손에 쥐고 있던 mp3를 잠시 바라봤다. 엔오의 시선 또한 덩달아 움직였다. 아끼던 물건인지, 사용감이 보임에도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 그냥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오늘 처음 왔는데, 바람을 맞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지만 임자가 있는 자리라면 내가 피하는 것이 맞겠지. 미안. 놀라게 해서. 

이즈미는 어딘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에 억눌린 듯 꾹 눌린 느낌. 

엔오는 그게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자신이 지난 한평생 가지고 살아온 것이니 모를 수 없었다. 속마음을 꺼내지 못하고 괜찮다며, 괜찮은 척을 하는 것. 엔오가 떠올린 것은 당연히도 이즈미가 착잡한 듯 보이게 만들 것과 달랐지만, 엔오는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선배도 이 장소가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 비켜주겠다는 거구나-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저··· 안 가셔도 되는데요···”

“···?”

“아니··· 피하실 필요 없다는 말이였어요. 또 만나기야 하겠지만··· 괜찮다고요.”

엔오의 말에 이즈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상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그러고는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즈미가 뭐지- 싶었던 엔오가 다시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이즈미는 작게 피식거리더니 먼저 말을 꺼냈다. 

“흐음- 그래. 세이야 라고 했지?”

“···? 네.”

“너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일도 와야겠네.”

갈게. 오늘은 일이 있어서.
내일 봐. 

···? 제가 뭘 그렇게까지 말했어요? 

··· 뭔가 제대로 꼬인 것 같은데. 엔오는 뒤돌아 아이돌과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 이즈미를 향해 뭔가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래 뭐,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딱히 정정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봤자 며칠 보고 말 사람 아니겠어?

점심시간 동안 기획서 하나를 마무리하려던 엔오의 계획은, 이즈미와의 만남 덕분에 진작에 사르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